님(府君)의 이름은 국언(國彦)이요 자(字)는 여극(汝極)이시다。시조이신 휘 서(瑞)께서 중국의 풍익 땅으로부터 우리나라로 오셔서 신라에 벼슬하시매 아찬(阿餐) 벼슬로서 비로소 우리나라에 사셨고 여러 대를 내려와서 고려에 이르러 학사 휘 빈(邠)께서(호는 초당 시호는 文貞) 교수(즉교동)부원군에 봉함을 받았으니 이 분이 인성(印姓)의 득관(得貫)중 시조이시고、석성부원군(휘 璫)은 十六세조가 되시며、함산군 (휘 元寶)은 十四세조(世祖)이시며 증조와 이름은 세중(世重)이요、조부의 이름은 정연(廷璉)이요、아버지의 이름은 이수(以秀)요、큰어머니는 동래정씨 광열(光悦)의 따님이니 두 아들올 낳으시매 아들은 국주(國周)요 작은 아들은 국형(國衡)이다。후취 어머니(繼妣)는 한양조씨 도행(道行)의 따님이시니 정조 갑인 八월 二十九일에 공을 낳으셨다。 님께서는 천성이 어질고 효성스러워 어릴 때부터 집안 청결과 혼정신성(晨昏之省)올 일찍이 조금도 태만하지 않았으며 집안이 본래 가난하여 끼니를 잇기가 어려웠으나 항상 백씨 중씨와 함께 탄식하여 이르기를 『사람이 나서 능히 부모를 잘 모시지 못한다면 어찌 아들의 직분을 다하였다 하겠느냐』고 하시고 이에 발을 갈아 힘써 심고 거두며 고기 잡고 나무하여 집안 형편이 점점 나아져서 남의 곡식을 빌리지 않게 되었고 성심으로 무모를 봉양하매 이웃에서 호자라고 칭송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헌종무오 八월 十五일에 돝아가시니 향년이 八十三세요、배위(부인)는 영동김씨 득인(得仁)의 따님으로 두 아들을 낳으시니 큰아들은 재홍(載洪)이요、작은 아들은 재승(載昇)인데 당숙 국원(國元)에게 양자를 갔다。두 손자는 조석(作錫) 상석(祥錫)이요、 증손은 기수(夔洙) 동수(東洙) 치수(致洙)이다。 슬프다! 님께서 평소에 효제근검(孝悌勤儉‥ 효도하고 공경하며 부지런하고 검소함)의 네 글자로 가훈을 상아 임종하실 때에도 유언이 또한 여기에서 그쳤다。불초가 얼굴을 뵙지(承顔)는 못했으나 대개 집안에서 들었던 것이 또한 여기에 그쳤고 비록 능히 그 유훈(遺訓)을 잘 받들어 준행치는 못하나 추모의 정만은 일찍이 잠시라도 감히 잊을 수 없으므로 대략 끼치신 행적을 기록하여 후손에게 알리는 바이다。 서기 一九三六年 丙子 四月 十六日 玄孫 元植 謹書